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
마지막(여섯 번째) 대당 명제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사랑에 관한 계명을
언급하면서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 전체를(5.21-48 참조) 갈무리하고
있습니다. 이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풀이를 꿰뚫는 핵심이 바로 사
랑임을 암시합니다.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기존의 관행에
서 벗어나, 모든 이가 사랑의 실천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. “너
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.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
라”. 이 명령은 어떤 면에서 가혹하게 들립니다. 정말 악의적이고 잔인한 행도
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, 백번 양보
하여서 그 원수를 용서하는 일까지는 어떻게든 노력하여 본다고 하더라도
그를 과연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? 그렇게까지 하여야 하는 이유가 도데
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.
결국은 다시 그 근거와 동기를 찾는 일이 중요해집니다. 오늘뺨을 때린
자에게 왼빰마저 내주는 것으로 모자라 그 원수를 사랑까지 하여야 하는
이유, 그것은 ‘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’께서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
니다. “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, 의
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.”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
신께 등을 돌리고 온갖 불의를 일삼는 자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같은
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. 곧 하느님께서는 편협한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
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. 아버지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자녀들의 사랑도 그
러한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. “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
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.” 루카의 병행 구절은 이를 자비로 바
꾸어 표현합니다. 곧 “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
람이 되어라”(6.36). 우리가 감히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완전함에 어떻게 도
달할 수 있겠습니까? 그러나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
과 가지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.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
고 도움을 청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,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함에
가까워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. ⊕
- 매일 미사 오늘의 묵상 필사 -